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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소식

뉴욕에서 소녀를 만나다 2017-08-17


 

뉴욕에 온 지 아홉 달이 지났다. 뉴요커 소리를 듣고 흐뭇하게 웃던 순간도 이제 다 지나간 일. 한국으로 귀국할 날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이곳에서 하나라도 더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조하다. 

 

 

#길거리에서 만난 예술

 

뉴욕은 화려한 쇼핑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섬세한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뉴욕 대학생들에겐 웬만한 박물관이나 전시회는 무료입장이다. 오페라나 음악회 표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거리 곳곳의 유명한 건물 앞엔 동상이나 조각이 서있다. 관광객들은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일단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본다.




사진1. 맨해튼 6번가와 55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 있는 [LOVE]
조형물. 관광객들은 물론 결혼이나 약혼을 한
뉴요커들이 기념사진을 찍어 더 유명해진 곳이다. /mercinewyork


뉴욕의 심장 타임스퀘어에서 센트럴파크 사이는 팝아트 작가 로버트 인디애나가 지배하는 거리다. 그가 만든 조형물 LOVE와 HOPE가 있다. 뉴욕은 사랑의 도시이자 희망의 도시라는 메시지일까. 한국 등 전 세계 곳곳에 LOVE 조각이 서있기 때문에 꼭 뉴욕만의 특별한  조형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뉴욕에 와서 LOVE와 HOPE를 꼭 카메라에 담아간다. 별거 아닌 것 같은 네 개의 알파벳. 그 앞에 서면 일단 사진은 잘 나온다. 그런데 나는 LOVE나 HOPE 보다는 발레리나가 더 좋았다.



 

사진2. 맨해튼 7번가와 53스트리트의 교차로에 자리 잡은 [HOPE] 조형물
[LOVE]보다는 사람들이 덜 몰린다. 뉴욕을 희망으로 덮자는 메시지가 담겼다고 한다. /hopeday 



크리스마스트리로 유명한 록펠러 센터. 트리가 있던 그 자리에 이번 초여름 유명한 팝아트 작가 제프 쿤스의 작품 ‘발레리나’가 자리를 잡았다(Seated Ballelina).



  
사진3. 올해 5월부터 한 달간 록펠러센터 앞에서 전시됐던 [SEATED BALLERINA].
이 시대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제프 쿤스가 거대한 풍선의 모양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jeffkoons



 
사진4. 사진으로 보면 발레리나의 크기가 잘 가늠이 되지 않아서
맞은편 saks백화점 발코니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이 발코니는 발레리나 덕분에 전시기간인 1달 동안은 손님으로 북적였다./박미정 


생뚱맞지만 잠깐 록펠러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얼굴도 본 적 없는 록펠러가 좋다. 그는 내게, 아니 모든 뉴요커들에게 이른바 ‘물의 神’이다. 백만장자였던 록펠러의 통 큰 기부로 맨해튼에 사는 대부분의 뉴요커들은 수도세를 내지 않는다. 록펠러 재단이 물 값을 대신 내는 것이다. (맨해튼 렌트 생활자의 경우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나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외다.) 물가가 비싼 뉴욕 맨해튼에서 물 값이 공짜라니... 나처럼 집을 렌트해 사는 뉴요커들에겐 그래서 록펠러는 고마운 ‘물의 神’이다.


얘기가 살짝 옆으로 샜지만 그 록펠러 센터 앞에 발레리나가 앉아있는데, 거대한 풍선으로 만든 일종의 설치미술이다. 이 작품은 ‘이 시대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아티스트 제프 쿤스가 ‘실종 아동의 날’(5월 25일)을 맞아 선보인 작품이다. 작가는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희망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말했다. 실종 아동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꼭 가족이 다시 만나라는 기대를 담았다는 것.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토슈즈를 신고 있는 발레리나에 그런 뜻이 담겼다는 걸 처음에 나는 몰랐다. 작품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작품의 의미를 알고 난 후 다시 바라본 발레리나는 왠지 처연하고도 외로워보였다. 이 발레리나는  한 달 정도 전시되고 철거됐는데, 이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록펠러의 초여름은 마치 크리스마스 같았다. 그리고 지금 가면 휑한 그 공간에 서보니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발레리나 풍선이 더 눈에 선하다.


 

 

#월스트리트에서 만난 소녀


월스트리트에 가면 신기하고도 정신없는 북새통 같은 장면을 맞닥뜨리게 된다. 나름대로 줄을 서고 매너 있게 기다리다간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아무도 질서를 지키지 않는 공간. 바로 <돌진하는 황소동상이 있는 곳이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이곳 월스트리트에서 황소는 강세장을 상징한다. 원래 이 동상은 1987년 이탈리아 출신 조각가 알트로 디 모디카가 만들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 앞에다 가져다 놓았다. 1987년은 주가가 대폭락했던 시기로 월스트리트의 암흑기였다. 철거해야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황소 같은 상승장을 기원하던 투자자들의 반대가 있었고, 지금의 월스트리트 <볼링 그린>공원 앞으로 옮겨졌다.



 
사진5. 황소를 만지면 부자가 되고 행운이 온다는 풍문에 월스트리트엔 관광객들이 몰린다.
줄을 서는 건 의미가 없다. 마구잡이로 황소동상에 일단 손을 얹고 포즈를 취하고 찍고 간다. /박미정 



이 황소의 뿔이나 머리, 혹은 중요부위를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풍문이 있다. 확인된 바 없는 이 스토리에,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서로 손을 뻗는다. 모두 웃고 있고 이것도 각자의 추억이다. 나 역시 그 거리에서 황소에 손을 얹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니, 왠지 추억보다는 탐욕이 찍힌 것 같았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은 건 당연한 건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아마도 그 맞은편에 있는 동상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우리말로 쉽게 번역하면 <겁 없는 소녀>라는 뜻이다. 몇몇 한국 언론에도 이렇게 보도됐다. 하지만 난 이 동상을 <두려움 없는 소녀>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마음에 든다. 이 소녀는 남성적인 황소동상 앞에 어깨를 활짝 펴고 당당하게 서 있다.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위풍당당한 자세로 자리잡았다. “한번 덤벼봐”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두려움 없는 소녀>동상엔 전 세계 여성들을 위한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부자가 되고 싶은 탐욕의 황소동상 보다는 요즘은 이 소녀 동상이 관광객들에게 더 인기를 끈다. 모두가 동상 옆에서 황소를 향해 당당한 포즈를 취한다. 



 
사진6. 황소 앞에 자리 잡은 <두려움 없는 소녀>의 모습.
황소에게 “덤벼봐”라고 하듯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statestreet


이 소녀 동상은 월스트리트 금융회사인 <스테이트 스트리트>가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설치했다. 대부분의 월스트리트 금융사들 수뇌부에 여성 임원이 거의 없다는 것을 고발하고 남성 위주의 월스트리트 임원진과 이사회, 그리고 미국 사회를 꼬집는다. 유리천장이 깨져야 한다는 메시지도 있다. 물론 논란과 비판도 거셌다. “왜 성인 여성이 아니라 아름다운 소녀의 동상인가?” “그렇다면 이 동상을 만든 <스테이트 스트리트>의 여성임원은 몇 명인가? 이사 11명중 3명일뿐이다.” “3명이 어때서? 아예 없는 것보단 낫지 않는가? 여성임원이 제로인 회사도 많다.” “여성을 금융회사 마케팅에 이용하지 말라”등등...




 
사진7. 여행 온 소녀들이 <두려움 없는 소녀>옆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박미정


이 소녀 동상 역시 철거 논란에 휩싸였지만, 빌 드 빌라시오 뉴욕시장은 이미 명물이 된 이 동상을 내년 2월까지 황소 맞은편에 놓아두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2018년 2월 이후에도 계속 이 동상이 월스트리트를, 황소 앞자리를 지킬 거라는 예감이 든다. 어쨌든 이 동상은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위상, 그리고 일자리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주었다. 딸아이를 <두려움 없는 소녀>옆에 세우고 사진 찍던 히스패닉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어깨 쫙 펴고 당당하게 서.”  

 

 

#컬럼비아대를 덮은 하늘색 물결

 

5월 뉴욕의 졸업식은 색깔 전쟁이다. 졸업식 가운 색깔이 한국처럼 검정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NYU학생들은 보라색 가운을 입는다. 커넬대학은 검정색과 붉은색이다. 내가 공부했던 컬럼비아는 하늘색이었다. 듣고 싶은 수업을 다 듣고 학기가 끝나갈 무렵, 드디어 나의 컬럼비아대학 생활도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왔다. CERTIFICATION을 받는 날이다. 역사를 가르쳤던 찰스 암스트롱 교수가 특별히 따뜻하게 축하해줬다. 찰스 암스트롱 교수는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그래서 가끔은 나와 살짝 한국말로 대화하기도 했다. 



 
사진8. NYU의 5월은 보랏빛으로 물든다. 학교마다 다른 색깔의 졸업식 가운을 입는다. /nyu  




 
사진9. 컬럼비아대학은 전통적으로 하늘색 가운을 입는다.
저 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학교 잔디밭에 가득 차면 하늘도 땅도 하늘빛이다. 아름다웠다. /columbia univ 



나는 비지팅 스칼라 신분이기에 졸업 가운을 입거나 학사모를 쓰는 의식은 없었다. 그렇지만 CERTIFICATION을 받고 마치 학위라도 받은 것처럼 기뻤다.

이제 서울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스토리를 좋아한다. 뉴욕에 온 관광객들은 스토리 있는 동상 앞에서 동영상을 찍고, 스토리 있는 작가의 작품 앞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뮤지컬 극장이 가득한 브로드웨이는 골목마다 스토리가 넘친다. 일본은 어떤가. 전설에 나오는 귀신까지 캐릭터 인형으로 만들어 낸다. 귀신까지 파는 나라가 일본이다. 내가 돌아갈 서울엔 어떤 스토리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뉴욕과 서울의 차이. 서울은 좀 더 매력적인 스토리를 고민해야할 것 같다. 


 
사진10. 컬럼비아대학에서 비지팅 스칼라 과정을 마치고 certification을 받았다. 
역사를 강의했던 찰스 암스트롱 교수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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